Rethink: 페미니즘 선언문을 다시 사유하다 2부 _이화여성주의학회 / 녹취록

Rethink: 페미니즘 선언문을 다시 사유하다

1960-1970S 래디컬 페미니즘 선언문들의 전복적 의미 

  1. 1부. 인사 및 학회 소개

  2. 2부. 한우리 선생님 강연

  3. 3부. 질의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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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리처드 닉슨에 반대하는 여성 시위에 참여한 티-그레이스 앳킨슨(이마에 ‘닉슨 탄핵’ 스티커를 붙인 정면 인물)과 플로린스 케네디(앳킨슨 뒤)(출처: Bettye Lane). [주1]

1978년 한 회의에 참석한 글로리아 스타이넘, 알리 스코트(Arlie Scott), 로빈 모건, 케이트 밀레트, 진 오리어리(Jean O’Leary)(왼쪽부터)(출처: Bettye Lane) [주2]


 

*2017년 4월 4일 행사의 부분 녹취록입니다.

 

2부 한우리 선생님 강연)

-래디컬 페미니즘과 문화주의 페미니즘 간의 차이

‘나쁜여자들의 전성시대’를 쓴 앨리스 에콜스는 래디컬 페미니즘과 문화주의 페미니즘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저도 그것에 굉장히 동의를 하는데요. 에콜스는 결국 래디컬 페미니즘이

자신이 당하는 억압을 중심으로 조직하라

는 모토에서,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조직하라

는 식으로 협소하게 변모해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한편 1970년 중반을 넘어서면 이제 ‘문화 페미니즘’이란 것도 등장하는데, 이 분들은

여성 해방만이 유일한 혁명! (한우리: 그게 뭔지도 정확히 설명하지 않고,경제/사회적 구조에 대해서 바꾼다는 이야기 없이)

남성의 성욕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 여성성을 찬미하자!

이런 식의 본질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여성성과 남성성을 구별하려 듭니다.

에콜스에 따르면 래디컬 페미니즘이란 것은 “성계급 체제 자체를 제거하려는 운동”이었던 반면에, 문화페미니즘은 “남성적인 것을 가치절하하고 오히려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던 여성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운동”(반(反) 문화 운동정도)이었습니다.[주3]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젠더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자”라는 식의 사회구성주의자들이라면 문화페미니스트들은 “여성성을 찬미하자”라는 식의 본질주의자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좌파 분석을 확장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봤다면, 문화 페미니스트들은 “좌파에 맞서는 해독제”로서 페미니즘을 주장하려고 했습니다. (…)

앨리스 에콜스의 ‘나쁜여자들의 전성시대’를 보면 ‘Cell 16’이라는 단체도 나오잖아요.  던바(Dunbar)라는 굉장히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이끌었던 좌파, 극렬 페미니스트 그룹이었는데 이 분들이 솔래너스의 스컴 선언문을 신조처럼 읽었다고 해요. 하지만 그 분들이 했던 활동들만 보면 굉장히 모순적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여자가 아기, 섹스, 예쁜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여자가 손상된 걸 뜻한다. 체제에 공모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자체가 손상된 것이다.”는 식의 얘기를 하면서, 커트머리를 고수하고 “남성과 관계를 아예 맺지 말자”는 식의 독신주의를 선언하면서, 여성성을 찬미하면서, 군복의 일종인 카고 팬츠를 입고다니는 것을 넘어서 유행시키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더 극렬하게 주장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도 하면서…이런 복잡한 활동들을 해나갔는데요. 저는 이분들의 활동이 문화 페미니스트의 전형을 보여줬단 생각이 듭니다.

 

-제2물결 안의 교차성

래디컬 페미니즘 하면은 항상 이런식으로 언급이 되지 않나요?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다르고,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 다르고 어쩌고저쩌고 해서 래디컬 페미니즘은 이러이러한 특징을 가졌는데 결국 백인·중산층 여성들만의 운동으로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고, 교차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이런식의 간략한 설명들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저 또한 그렇게 배웠었는데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얄팍하게만 서술되어 있는 래디컬 페미니즘이란 것이 사실은 굉장히 다양한 페미니즘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지금 우리가 페미니즘이라고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원류를 찾아 볼 수 있는 흐름이었단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

저는 래디컬 페미니즘, 제2물결 페미니즘 안에 교차성이 이미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오늘 이 자리에서. 그것이 이미 선언문들 안에 나와있습니다. 래디컬 페미니즘이 교차성을 언급하지 않았고 백인·중산층 여성들만의 운동이었다는 편견에 대해서도 좀 다르게 이해해보자, 바라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성차별이 인종차별이나 계급차별보다 더 심각하고 근원적인 차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여성을 하나의 계급으로서 묶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당연히,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곧 ‘자매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겠죠. 그리고 그 차별의 체계를 만드는 가부장제에 대한 이야기도 필요하게 됩니다. (…)

래디컬 페미니스트에게 중요한 활동 중 하나는 ‘의식 고양(consciousness raising)’입니다. 10명 정도의 소그룹을 만들어서 자신이 여성으로서 얼마나 불쾌한 경험을 했는지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 이게 나만의 경험이 아니고 여성 모두의 공통적 경험이구나”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굉장히 정치적으로 파워풀한 명제인데요. 여기서 우리가 좀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것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해결이란 것은 없고 오로지 집단적인 해결책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는 것도 같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흑인 페미니스트은 제2물결 페미니즘이 시작했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은 상대적으로 ‘흑인 민권운동’에 조금 더 투신한 부분이 있었지만요.[주4] 제2물결 페미니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추적하면, (앨리스 에콜스의 저서를 읽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학생운동을 하다가 답답함을 느끼고 남성중심적인 운동을 벗어나고 싶었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들이 만든게 제2물결 페미니즘의 시작이에요.[주5] 그 ‘학생운동’이란 것은 결국 ‘흑인 민권운동’이기도 했었습니다.

당시의 미국에서는 흑인들에게 선거권을 주긴 했었지만, 남부를 중심으로 흑인들이 선거권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어요. 주법 상으로, 투표를 하려면 인두세를 내야 했었어요. 또, 일종의 ‘할아버지 조항’ 같은 것을 만들어서 “몇 대의 할아버지가 투표를 하지 않았으면 그 자손들도 투표를 할 수 없다”는 식의 차별도 있었습니다. 혹은 ‘문맹 시험’을 흑인들에게 보게 해서 글씨를 모르면 투표를 못하게 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런 조치들은 백인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남부지역의 흑인 투표율을 낮추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1960년대의 미국 대학생들은, (마치 지금 우리가 농활을 가듯이), 남부에 내려가서 ‘자유의 여름 (Freedom Summer)’이란 것을 조직해요. 여름방학 때 남부로 이동해서 흑인들의 유권자 등록을 돕는 거죠. 여성들이 이런식의 흑인 민권 운동에 참여하면서, (합숙 등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짜증나는 일과 관계들을 겪었고 “나는 더이상 못하겠다”는 식으로 나와버린거에요. 그리고 자기들끼리의 의식화 모임을 조직했던 일들이, 제2물결 페미니즘의 초기 시작이었습니다. 때문에 흑인 페미니즘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흑인 여성들은 2중, 3중의 억압 속에 있었고 그것을 언어화하고 그것과 맞서싸워나가려 했었던 것을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또, 래디컬 페미니즘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가 레즈비언 페미니즘인데요.(…)

이 글,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문 (The Woman Identified Woman)’이 선포될 때의 맥락은 최근의 한국에서의 어떤 사건과 유사합니다. 문재인씨께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을 했을 때,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하시는 여성 활동가가 자신의 인권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청중들은 ‘나중에, 나중에’라는 식으로 무마시키려고 했었던 사건이 있었죠.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문’이 선포될 때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여성단체연합’이라던가 ‘여성부’ 같은 엄청 큰 단체에서 여는 회의석에, 레즈비언 연사는 아무도 초청을 받지 못했고 그들의 의제를 의제화할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어떤 레즈비언들은 전체 홀을 정전시켜버리고 마이크를 탈취해서, 선언문을 찌라시처럼 뿌리고, 강제로 앞에서 이 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는 여성이 생존하는 방식들이 남성과 관계에 의해서만 정의됨을 이 선언문을 지적합니다. 어떤 남성과도 관계를 맺지 않은 여성, 예를 들어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남성과 이혼한 이혼녀/남자 친구하나 없는 여자/노처녀/혼자 사는 여자, 이런 여자들이 기존에 굉장히 ‘불쌍한 여자’, ‘불완전한 존재’로만 여겨졌다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이에 대해 반발합니다. 남성에 의해서 정체성이 주어지거나   남자의 소유물이 되는 대신에 여자 스스로도 ‘온전한 여자’, ‘스스로 여성의 정체성을 선택한 여성’들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을 정의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운동의 에너지가 ‘자매애’를 위한 것이지 ‘남성들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여성’이라는 강제적인 범주를 자발적인 것으로 바꾸고, 강제적인 이성애 구조에 균열을 내려고 했었습니다. 이성애 제도에 대한 혁파와 의문 없이는 페미니즘이 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고, 이것은 래디컬 페미니즘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쓰레기, 껍데기, 물신화

이 책을 냈을 때 한가지 지적받은 것 중 하나가 The S.C.U.M. Manifesto를 ‘남성 거세 결사단 선언문’으로 번역한 것이었는데요. 왜 굳이 ‘남성 거세 결사단’이어야 했냐는 게 질문이었어요. Scum이란 단어 자체에 ‘쓰레기’, ‘인간 쓰레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고, 밸러리 솔래너스가 다중적인 함의를 의도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드는데요…  솔래너스는 앤디워홀을 총격한 후 언론들의 엄청난 주목을 끌었고, 당시 이 선언문은 올랭피아 출판사 판본으로 처음 출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솔래너스는 출간된 결과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론들이 앤디 워홀 피격에만 초점을 맞췄고 솔래너스가 말하려고 했던 선언문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고, 올랭피아 판본의 표지에도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사실… 솔래너스는 (올랭피아 판본이 나오기 전에는) 이 선언문을 자비를 들여 등사기로 밀어가지고 출판물로 만들어 거리에서 팔면서 생활을 했었거든요. (그 등사기로 만든 최초 버전 같은 경우에도 표지에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부제가 있었는데도, 올랭피아 판본을 유독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맥락도 있습니다.) 이것으로만 가지고는 생활이 안되니까 성판매도 같이 했어요. 정체성은 레즈비언이었는데도요. 그녀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배우를 한적도 있고, 앤디워홀의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었습니다. (…)

저는 솔래너스의 글이 진지하게 취급받는 동시에, 진지하게 취급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솔래너스의 말 그 자체를 물신화하는 것은, 그 글이 가진 파괴적인 힘을 빛 바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저는 들었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얘기할 ‘미러링’이나 ‘워마드’와 관련되 있기도 할텐데요. (…) 앨리스 에콜스의 ‘나쁜여자들의 전성시대’를 보면 ‘Cell 16’이라는 단체도 나오잖아요.  던바(Dunbar)라는 굉장히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이끌었던 좌파, 극렬 페미니스트 그룹이었는데 이 분들이 솔래너스의 스컴 선언문을 신조처럼 읽었다고 해요. 하지만 그 분들이 했던 활동들만 보면 굉장히 모순적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여자가 아기, 섹스, 예쁜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여자가 손상된 걸 뜻한다. 체제에 공모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자체가 손상된 것이다.”는 식의 얘기를 하면서, 커트머리를 고수하고 “남성과 관계를 아예 맺지 말자”는 식의 독신주의를 선언하면서, 여성성을 찬미하면서, 군복의 일종인 카고 팬츠를 입고다니는 것을 넘어서 유행시키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더 극렬하게 주장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도 하면서…이런 복잡한 활동들을 해나갔는데요. 저는 이분들의 활동이 문화 페미니스트의 전형을 보여줬단 생각이 듭니다. 이것과 연관시켜 봤을 때, 저는 ‘미러링’이 지나치게 물신화되버리진 않았나란 생각도 조심스럽게 듭니다.

이 선언문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처음부터 설득을 목적으로 쓴 글이나 객관적으로 논증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는 것은 아실거에요. 솔래너스 또한 공론장의 규칙을 깨는 여성이죠. 과잉인거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엄청나게 쏟아놓은 글들을 통해서, 읽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불편함’을 안겨주려고 했던게 아닌가 합니다. 이 글을 남자들이 본다면, 마치 댓글창에 “남혐하는 여자들이 문제다.”라는 말이 달릴 것 같죠. 솔래너스는 마치, 자기가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굴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봤을 때 그녀는 아무 지위도 가지지 못했고, 정상성이라는 범주에서 굉장히 벗어난 비정상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밑바닥 하층 계급이고 길바닥에서 자신의 성을 파는 여성이자 레즈비언이죠. 이런 여성이, 선언문 속에서는 “마치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몫도 없는 자가 몫이 있다는 것처럼요. (…) 그 동안에는 ‘소음’이라고 무시되었던 것들은, “담론이다.”라고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는 것과 같은 활동을 ‘정치’라고 본다면 솔래너스의 이 글이 ‘광기어린 미친 여자의 헛소리’가 아니라 굉장히 정치적인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솔래너스의 글에 대해서 거의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채로 잊혀졌던 것에 대해 저는 조금 문제제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 사상가이자 예술가로서 남성중심적이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는 동시에, 자신의 몸을 생존을 위해서 팔아야하는 상황 속에서 누구보다도 분열적인 위치에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 호미바바(Homi K. Bhabha)의 이야기도 솔래너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호미 바바가 말하는 것은 ‘식민지인의 흉내내기와 모방’이거든요. 이 ‘모방, 미미크리(Mimicry)’란 것이  전복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고 바바는 보았습니다. 이 모방을 통해서 지배자의 권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 제국주의의 견고함이 손상될 수 있다는 점을 통해서 감시의 시선을 되돌리고 ‘관찰자’를 ‘대상’으로 만드는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솔래너스의 글에서 이것들이 잘 보여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갈리아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상황, 남성들의 반응도 이와 비슷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메갤문화’라는 드립들이 난무했을 때, “이렇게 유머러스하고 드립 잘 치는 글을 쓴 사람이 여성일리 없어” 라고 남성들이 반응했었으니까요. “여자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글을 쓸리가 없어. 글쓴 사람은 여자가 아닐거야.” 라는 식의 반응이 메르스 갤러리와 메갈리아가 나타났을 때 보여지는 것들이었거든요. 그만큼 여성들이 남성의 언어를 모방할 수있고 남성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남성들에게는 충격적이었던 거에요. 솔래너스의 글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드러나있습니다. 혹은, 어쩌면 이 글 자체를 ‘비유’로서, ‘문학 비평’을 하듯이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행간 사이에 주목을 한다던지… 이 글이 말하고 있는 것을 넘어서서, 글 자체를 물신화하는 게 아니라, 함의하는 바들을 다층적인 서사로 읽어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스컴 선언문에서 솔래너스가 언급한 어떤 말인데요. 이런 구절이 있어요.

자신감 있고 활기차고 멋지며 스릴을 추구하는 여자-여자는 남자의 이익에 영합하는 남자-여자들을 경멸하고 나를 경멸할 것이다.

(한우리: 여기서 ‘남자의 이익에 영합하는 남자-여자’는, ‘흉자(흉내잦이)’죠.)

솔래너스는 자기 자신이 경멸당할 것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스컴 선언문에서의 Scum(찌꺼기, 쓰레기, 인간 쓰레기)은 자기 자신을 뜻하는 것일 수 있었습니다. 솔래너스가 일종의 욕받이 무녀 역할을 한게 아닌가란 생각이 드는데, 지금 누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나요? 워마드?

그런데, 솔래너스만이 특별한 사람인가?를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어요. 이런 거칠고 공격적인 언사를 제쳐 놓고 본다면 그렇습니다. ‘선구적인 여성’, ‘선구적인 페미니스트’ 등 중에서 솔래너스가 처했던 것과 유사한 분열적인 위치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하다가 좌절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행려병자로 죽어간, 단명한 여성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습니다.

 


 

[주1] 앨리스 에콜스, 유강은 옮김·엄혜진 해설, 『나쁜 여자 전성시대: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 (Daring to Be Bad: Radical Feminism In America 1967-1975)』, 2017, 312p

[주2] 앨리스 에콜스, 유강은 옮김·엄혜진 해설, 『나쁜 여자 전성시대: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 (Daring to Be Bad: Radical Feminism In America 1967-1975)』, 2017, 313p

[주3]

1970년대 초에 이르러 급진 페미니즘은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1975년부터는 문화 페미니즘의 그림자에 뒤덮였다. 문화 페미니즘은 급진 페미니즘 안에서 자라났지만 급진 페미니즘의 많은 근본적인 내용을 부정하는 흐름이었다. 문화 페미니즘이 부상하면서 여성 해방 운동은 남성 우월주의에 반대하는 문제에서 ‘남성적’ 가치를 몰아내고 ‘여성적 가치를 양성하는 공간인 여성의 반문화(메리 데일리 Mary Daly는 여기에 ‘새로운 공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를 창조하는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이런 여성만의 공간은 원래 일종의 능동적 저항의 문화로 상상됐지만, 에이드리언 리치 Adrienne Rich가 얼마전에 지적한대로, 대개 그 공간은 오히려 가부장제에 맞서 싸우는게 아니라 그냥 회피하기 위한, ‘그것 자체가 목적인 이주의 장소’가 됐다. 그 결과 사회 변혁보다는 개인 변혁으로 초점이 바뀌었다.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작가인 메러디스 텍스 Maredith Tax는 일찍이 1971년에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자기들의 정치를 전적으로 생활 방식의 문제로 정의하는 듯했다고 회고한다. 텍스는 여자들이 마치 대단한 정치적 의미라도 담긴 행동인 양 주말 내내 자동차를 손보느라 씨름했다고 자랑한 기억을 떠올린다. 텍스는 말한다. “다른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걱정했다. 설마 이게 전부는 아닐 텐데?” 그렇지만 1970년대가 흘러가면서 이런 일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됐다. 그리고 1975년에 이르러 급진 페미니즘은 사실상 하나의 운동으로서 자취를 감췄다. 급진 페미니즘이 문화페미니즘에 밀려나게 되자, 행동주의는 대부분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영역이 됐다. 워싱턴의 여성 해방론자인 프랜시스 채프먼 France Chapman에 따르면, 급진 페미니즘은 마치 ‘모든 것을 움직이고 가동을 멈춘 뒤 많은 실수를 하는 더 큰 개혁 엔진에 배턴을 넘긴 발전기’ 같았다.”

앨리스 에콜스, 유강은 옮김·엄혜진 해설, 『나쁜 여자 전성시대: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 (Daring to Be Bad: Radical Feminism In America 1967-1975)』, 2017, 37p

 

급진 페미니즘은 여성 해방 운동 안에서 계속 지배적 경향을 유지했지만, 1973년부터 문화 페미니즘이 하나로 뭉치면서 급진 페미니즘의 지배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급진 페미니스트와 문화 페미니스트가 서로 치명상을 입히는 갈등을 겪은 1975년 이후 문화 페미니즘은 여성 해방 운동안에서 급진 페미니즘을 앞질러 지배적 경향이 됐고, 그 결과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여성 운동을 대표하는 목소리가 됐다. (..) 이를 테면 《에브리우먼》1970년 12월호에서 앤 퓨리Ann Fury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여성 문화로 후퇴하면’ 안 된 다고 경고했다.

여느 피억압자들처럼 우리에게도 우리의 관습과 언어가 있다. 그렇지만 자율성의 환상을 부추기기 위해 고안된 이 문화는 두려움의 징후일 뿐이다. 이 문화 속으로 물러나면 노예 상태를 받아들이게 된다. … 더욱이 우리 문화속으로 물러나면 정치적 진로를 도덕주의로 덮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가 남성의 문화보다 어쨌든 ‘더 낫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가정된 우월성의 뿌리를 우리의 타고난 본성에서 찾는다. 우리의 무력함 때문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통제권을 잡는 순간 그 문화를 해체하는 데 동의해야 할 테기 때문이다. … 권력을 획득하면, 우리는 권력자들의 특징을 띠게 된다. … 우리는 선택된 사람들이 아니다.

앨리스 에콜스, 유강은 옮김·엄혜진 해설, 『나쁜 여자 전성시대: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 (Daring to Be Bad: Radical Feminism In America 1967-1975)』, 2017, 367p

 

문화 페미니즘이 성공한 이유는 단지 좌파를 향한 여성의 분노를 조종하거나 보편적 자매애 관념을 장려한 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여성 문화를 주창하는 모든 이가 문화를 통해 여성들 사이의 갈등을 막거나 페미니즘에서 ‘좌파주의 찌꺼기 leftover leftism’를 없앨 수 있단는 확신에서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화 페미니즘이 그토록 매력적인 존재로 여겨지게 만든 큰 이유는 여성들에게 남성 우월주의(와 몇몇에게는 정치 투쟁의 흥망성쇠)에서 벗어나는 안식처와 언뜻 보기에는 종속에서 탈피하는 통로를 제공한 점이었다.(…)

1973년 헬렌 해리스와 리 슈윙이 《퓨리스》신문에 페미니즘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다음 단계’로 페미니스트 기관을 주창하는 글을 쓰기 전까지 페미니즘 사업체에 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1973년만 해도 페미니스트들이 사업 활동에 관여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이단적인 사고인 탓에 해리스와 슈윙은 이런 사업체를 기관이라는 완곡어법으로 표현했다. 해리스와 슈윙은 페미니스트 기관을 만들면 여성 운동의 다양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페미니스트들이 정치 활동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을 테니 ‘오전 아홉시부터 오후 다섯시까지’ 계속 일하는라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아도 됐다. 또한 페미니즘 기획 사업과 연구 그룹의 재정을 감당하기 위해 여자들이 종일 직장에서 분주하게 일하느라 이런 사업과 그룹이 해산되는 일도 없을 터였다. (…) 해리스와 슈윙은 페미니즘 사업체에 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시했지만, 이 문제를 놓고 《퓨리스》직원들 사이에 견해차가 워낙 컸다. 신문 역사상 처음으로 ‘퓨리스’가 그룹 성원인 로레타 울름슈나이더 Loretta Ulmschneider와 데보라 조지Deborah George의 반론을 실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여성들이 ‘실제로 생계유지용 직업보다 레즈비언/페미니즘 사업체에서 더 많은 자유 시간을 누리면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된다’는 해리스와 슈윙에 가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울름슈나이더와 조지는 페미니즘 사업체는 그런 일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자원과 기술을 갖고 있는 중간 계급 여성들에게 가장 이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해리스와 슈윙이 대안적 사업체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분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울름슈나이더와 조지는 대안적 기관은 사람들을 더 커다란 투쟁에서 분리시킨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이고’ 자기들이 모인 특정한 집단의 문제와 동학에만 몰두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퓨리스’의 많은 예전 성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은 해리스와 슈윙이 하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퓨리스’ 공동체가 해체된 뒤, 몇몇 성원들은 페미니즘 사업체를 설립하는 데 관여했다. ‘퓨리스’의 예전 성원들은 페미니즘 사업체의 발전을 장려하는 《퀘스트-어 페미니스트 쿼털리 Quest: a feminist quarterly》, 다이애나 출판사 Diana Press, 올리비아 레코드, 여성유통Women in Distribution 등을 만들었다. (…)

페미니스트 기관과 사업체들은 여성의 삶에서 즉각적이고 실체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라는 여성들에게 호소했다. 이를테면 올리비아 레코드의 제니퍼 우덜은 이렇게 주장했다. “‘정치행동’이 여성들의 삶에서 항구적인 물질적 개선으로 귀결되지 않는 다면, 계속 더 많은 정치 행동을 하자고 주장하는 일은 쓸모없는 짓이다.” 페미니즘 사업체들은 사업에 찬성하는 여성들에게 자급자족과 자결권을 약속했다.(…)

1960년대의 급진주의는 실제로 때로 패배주의에 굴복했고, 이따금 위계에 맞선 심리적 반감이 야기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브라운과 모건이 인정하려 하지 않을 지라도 문화 페미니즘의 분별없는 낙관주의에 과감하게 반대한 이들의 정치적 염려는 정당한 반응이었다. 과거에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구조화하려는’ 욕망 속에서, 곧 전통적인 조직의 ‘얼어붙은 위계’를 피하기 위해 위계를 거부했다. 이런 태도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무척 파괴적일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나쁜 충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성공’을 회의적으로 보는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시각은 미국 사회에는 개혁보다는 철저한 개조가 필요하다는 확신만이 아니라 체제 흡수에 관한 타당한(때로는 마비를 일으키는) 공포에서 기인하는 반응이기도 했다.

물론 여성들이 대안 기관을 거쳐 실질적인 경제적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고는 돈키호테식 공상이었다. 페미니즘 사업체는 여성 인구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이용했고, 페미니스트 인구 중 극소수만을 고용했다. 게다가 페미니즘 사업체가 여성들에게 경제적 힘을 부여하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만이 아니라 이런 사업체의 성공까지 가로막는 구조적 장벽을 무시했다. 문화페미니즘 전반이 그렇듯이, 마치 여성문화가 문화 전체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존재할 수 있고 그렇게 존재하는 양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 흐름이었다.

앨리스 에콜스, 유강은 옮김·엄혜진 해설, 『나쁜 여자 전성시대: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 (Daring to Be Bad: Radical Feminism In America 1967-1975)』, 2017, 402-411p

 

앨퍼트, 색스, 스타이넘, 페미니스트경제네트워크 등을 둘러싼 논쟁은 여성 운동의 정체성과 방향에 관련돼 있었고, 따라서 가끔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다. 문화 페미니스트들은 가끔 자기들을 비방하는 이들이 신좌파처럼 ‘올바른 노선’에 집착하는 ‘파괴적’ 스타일에 몰두한다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렇지만 문화 페미니스트들도 스스로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고 때때로 ‘자매답지 못하다’는 딱지를 붙였다. 문화 페미니스트들은 자기들에게 비판적인 페미니스트들을 걸핏하면 반페미니스트나 ‘남성적 좌파의 꼭두각시’로 치부했다. 실제로 문화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갈등을 운동권과 페미니스트 사이의 분열이 반복되는 지겨운 재연으로 묘사하려 했다. 그때 세간에 자자하던 소문에 따르면, 앳킨슨과 슐먼과 셔먼은 ‘사가리스를 붕괴시키려고 ‘남성적 좌파’가 보낸 첩자들’이었다. (*유체: 문화 페미니즘의 부상과 함께 시작된 급진 페미니즘 쇠퇴를 늦추기 위한, 레드스타킹스의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잡지 《미즈》에 대한 공격 이후, 이 행동의 불씨와 전선이 사가리스 쪽으로 옮겨갔다는 묘사가 이 책에 나옵니다. 사가리스는 《미즈》재단의 지원금을 받아 운영되었던 페미니즘 교육기관이었고, 앳킨슨과 슐먼, 셔먼은 사가리스를 탈퇴한 급진 페미니스트였습니다.)

앨리스 에콜스, 유강은 옮김·엄혜진 해설, 『나쁜 여자 전성시대: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 (Daring to Be Bad: Radical Feminism In America 1967-1975)』, 2017, 419-420p

 

[주4]

1세대와 2세대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적인 만남에 관해 급진 페미니스트 바버라 메르호프 Barbara Mehrhof가 한 설명을 보면, 1960년대 급진주의자들과 바로 앞선 세대의 급진주의자들을 가르는 간극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메르호프는 1969년 1월 좌파가 벌인 닉슨 대통령 취임식 대항 시위의 하나로 페미니스트 행동을 조직한 여성해방 그룹의 일원이었다. 앞선 세대의 페미니즘을 타락시킨 주범이라고 스스로 주장한 여성 참정권은 이제 생명을 다한데다 진정한 해방을 위한 새로운 운동이 진행 중이라고 선언하는 일이 항의 시위를 벌인 목적이었다.

그 여성들은 유명한 참정권 운동가이자 전국여성당 National Women’s Party 창설자인 앨리스 폴 Alice Paul 을 만나서 ‘투표권 반납 운동’에 참여할 뜻이 있는지 알아보려 할 정도로 아주 당돌한 모습을 보였다. 참정권이라는 대의를 위해 투옥까지 견딘 사람인 만큼 폴은 ‘여성의 환심을 사려는 뇌물’이라고 참정권을 거부하는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같이 무대에 올라가서 유권자 등록증을 불태우자고 하자 폴은 길길이 날뛰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폴이 볼때 여성 참정권은 평등을 쟁취하려는 여성들의 투쟁에서 의미심장한 돌파구를 나타내는 성과였다. 그렇지만 민권 운동과 신좌파에서 정치교육을 받은 여성 해방론자들에게 투표란 ‘가짜 민주주의’고, 근본적으로 불편등한 사회에서 평등이란 역겨운 허구였다. 여성 해방론자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평등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급진 페미니즘은 특히 참정권 이후 시대에 앨리스 폴과 폴이 이끄는 전국 여성당이 설명하는 식의 협소하고 보수적인 페미니즘하고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에 여성당은 둘 다 여성이 관련된 문제인데도 노동 조건과 흑인 참정권 박탈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기를 거부했다. 이 문제들이 ‘순수한 페미니즘’의 쟁점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앨리스 에콜스, 유강은 옮김·엄혜진 해설, 『나쁜 여자 전성시대: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 (Daring to Be Bad: Radical Feminism In America 1967-1975)』, 2017, 46-47p

 

[주5]

민권 운동과 신좌파가 2세대 페미니즘을 발생시키는 데 도움을 준 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1960년대 급진주의의 세계가 낯선 독자들에게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와 민주사회학생연합Students for Democratic Society·SDS을 소개해야 한다. 두 그룹은 흔히 ‘운동’이라고 말하는 세력하고 사실상 동의어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1960년 초 남부전역을 휩쓴 간이식당 앉아 있기 운동 sit-in에 참여한 흑인 학생들이 1960년에 창설한 조직이다. 이 조직은 남부 전역에서 유권자 등록 사업을 확립하고 프리덤 섬머 Freedom Summer를 창시했다. 등록 시도를 도우려고 북부의 백인 학생 800명이 미시시피 주로 간, 1964년에 벌어진 유권자 등록 캠페인이었다. (…)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남부의 권력 구조에 맞서 의도적으로 대결을 도발했고, 다른 그룹들이 손대기 힘들다고 여긴 최남부 여러 지역에 과감하게 진출했다. 이 그룹 활동가들은 대의에 헌신하고 기꺼이 ‘목숨까지 내걸면서’ 금세 민권 운동의 ‘돌격대’라는 명성을 얻었다. (…)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1960년대 말에 해산하지만, 60년대 꽤 긴 기간동안 내내 흑인 자유 운동의 선두를 이끌면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블랙 파워 Black Power를 주창하는 첫 민권 그룹이 됐다.

민주사회학생연합은 1960년에 산업민주연맹의 청년그룹으로 창설됐다. 산업민주연맹은 사회민주주의와 철두철미한 반공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구좌파 그룹이었다. 1962년 톰 헤이던 Tom Hayden이 초안을 쓴 <포트휴런 선언>에서 민주사회학생연합은 미국 민주주의 전통이 앙상한 뼈대만 남은 현실을 개탄하면서 ‘참여 민주주의’를 통해 이 전통을 되살리자고 호소했다. (…) 산업민주연맹 같은 구좌파 그룹들이 명확한 이데올로기와 조직의 응집력을 얻으려 애쓴 반면, 민주사회학생연합은 ‘운동을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민주사회학생연합이 전통적인 정치 활동, 특히 선거 정치에 무관심한 사실만큼 정치 전문가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문제는 없었다. (…)

1964년부터 1965년까지 민주사회학생연합은 북부 빈민가에서 지역 노동조합 Community Union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인종을 뛰어넘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에 불을 붙이여 했다. 지역 노동조합 고안자들은 경제조사행동프로젝트를 통해 가난한 백인들을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한 흑인 자유 운동을 한편으로 삼은 연합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기대했다. (…)

여성 해방과 1960년대 사회 변혁 운동의 관계는 복합적이고 역설적이다. 신좌파와 민권 운동이 모두 기껏해야 성적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 별 관심이 없는 남성들이 지배했다. 남성 쇼비니즘의 존재를 인정하고 명목상으로는 여성 문제를 지지한 구좌파하고 다르게, 신좌파는 처음에 젠더 관계에 관한 비판적 의식이 전혀 없었다. (…)

신좌파와 민권 운동에 성차별주의가 존재했지만, 여성들이 이 운동들에서 조금도 줄지 않은 구제 불능의 억압만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에번스가 생생하게 보여주듯이 이 운동들은 또한 백인 여성들에게 기능을 발전시키고 여성을 속박하는 전통적 구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민권 운동과 민주사회학생연합의 경제조사행동프로젝트 같은 북부의 지역 사회 조직화 사업에서 모두 여성들은 정치적 기능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민권 활동에 따르는 위험과 끈질기게 남아 있는 기사도 전통때문에 백인 여자들은 대개 사무실이나 자유학교 Freedom School에서 일했다. 그렇게 신좌파와 민권 운동에 속한 여자들이 종종 ‘여성의 일’에 종사하기는 했지만,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스스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사회학자이자 ‘운동’ 활동가인 위니 브레인스가 주장한 대로 여자들이 개인적이나 정치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한 탓에 처음에는 ‘운동’의 성차별주의를 제대로 보지 못한 듯 하다. 신좌파이자 초창기 여성해방 활동가인 나오미 웨이스타인은 확시히 이런 경우였다. ‘운동’이 자기를 침묵시키는 동시에 힘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웨이스타인은 1966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벌어진 징병 반대 앉아 있기 운동을 회고했다.

말이 나오지 않고, 무서워서 말을 할 수 없지만 … 그러면서도 황홀경을 느끼는 정신 분열 상태를 경험했다.

자기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브레인스가 제적하듯이 여성들은 운동을 통해서 힘을 얻었고, 결국 평등 운운하는 ‘운동’의 언어와 그 안에서 여성이 놓인 종속 상태 사이에 분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백인 여성활동가들은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유력한 젊은 흑인 여설들과 흑인 공동체의 나이든 여성들을 만나면서 문화적으로 받아들인 여성성의 통념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여자들은 어느 모로 보나 남자 조직가와 공동체 지도자들만큼 유능했기 때문이었다. 민권 운동가 도로시 도슨 벌레이지 Dotothy Dawson Burlage는 난생 처음으로 정말 존경할 수 있는 역할 모델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1960년대 말 급진 여성들은 민족 해방 추쟁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 베트남과 쿠바 여성들에게서 역할 모델을 발견했다. (…)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와 시카고 경제조사행동프로젝트에 모두 관여한 비비언 레버그 로스스틴 Vivian Leburg Rothstein은 프로젝트의 남자 조직가들이 지역 사회의 실력자들을 상대로 경쟁하면서 지역 지도부가 등장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일을 회고했다.

우리가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일일이 지시를 하면서 챙겨줘야 하는 무능한 남자들 뿐이었다. 그게 진짜 문제였다.

그렇지만 남성들의 조직화 시도가 종종 동네 남자들을 상대로 한 무의미한 경쟁으로 이어진 반면, 여성들은 여자, 특히 생활보호 대상 유자녀 여성들을 조직하는 데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민주사회학생연합 지도자 스티브 맥스 Steve Max는 이렇게 회고한다.

실제로 지역 사회 사람들하고 관계를 맺는 문제에서는, 특히 경제조사행동프로젝트가 벌인 활동이 대부분 생활 보호 대상 유자녀 여성들에 관련된 탓에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쪽은 여자들이었고,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남자들은 언제나 남부 억양을 익히는데 신경쓰면서 대화를 머뭇거렸다.

(…) 에번스가 지적하듯이 동네 여자들은 남자보다 더 조직하기 쉬웠다. 대개 여자들은 지역 사회문제에 더 영향을 많이 받고 조직가들이 접근하기도 쉽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제조사행동프로젝트 여성들이 능력과 자신감을 키우기는 했지만, 그 여성들이 쌓은 성취가 동료 남성들에게 곧바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실제로 에번스는 여자들이 유능해도 ‘인기 스타’는 남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신좌파는 또 다른 중요한 면에서 페미니즘 의식이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신좌파에게는 구좌파 같은 ‘여성 문제’에 관한 인식이 없었지만, 정치에 관한 구좌파의 협소한 이해를 거부함으로써 여성 활동가들에게 겉보기에 개인적인 관심사를 정치의 문제로 정의하게 부추겼다. 1962년에 개인적인 것을 다시 주장하자고 호소한 사람은 바로 톰 헤이던이었다. 그리고 1962년 《포스트휴런 선언》은 이렇게 선언했다.

(신좌파) 사람들이 개인적 고통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원천을 확인하고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조직할 수 있도록 무기력하고 왜소하다는 느낌에 … 형태를 부여해야 한다.

신좌파 성원들은 개인적 관계의 문제까지 아우르도록 정치 담론을 확대함으로써 페미니스트들이 결혼, 가족, 섹슈얼리티를 비판할 수 있는 길을 닦았다. 게다가 개인적 욕구를 ‘투쟁’에 종속시키라고 요구한 구좌파하고 다르게 신좌파는 사람들에게 ‘운동’을 통해 개인적 성취를 추구하라고 장려했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자기의 욕구가 사소한 문제로 치부된다고 느낄 때 ‘운동’을 위해 이 욕구를 제쳐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세워주는 한편 좌절감만 안기는 역할을 깨뜨릴 기회를 주는 동시에 이 ‘운동’은 역설적으로 백인 여성들에게 점점 적합하지 않은 장소로 바뀌고 있었다. 실제로 에번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그런 모순, 곧 새로운 가능성을 잃을지 모른다는 위협 속에서 생겨났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안에서 백인 여성들, 심지어 메리 킹 Mary King이나 케이시 헤이던 Casey Hayden 같은 ‘유력한 내부자들’ 조차 1964년 프리덤 서머 이후에 영향력이 줄어드는 상황을 지켜봤다. 프리덤 서머 조직가들은 많은 백인이 참여하면 미디어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 결과 연방 정부가 인종 분리에 맞선 투쟁에 어쩔 수 없이 개입하게 되기를 기대했다. 이 전략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지만, 인종간 반목 사태가 표면화되면서 인종을 초월한 ‘소중한 공동체’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됐다. 많은 흑인 민권 활동가들이 선심을 쓰는 듯하고 오만한 백인 자원봉사자들의 행태에 분개했다. 게다가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성적 관계를 맺는 일이 빈발하자 많은 흑인 여성 간부들이 분노했다. (…)

자유학교 프로그램 책임자로 일한 저명한 신좌파인 스토턴 린드 Staughton Lynd는 이렇게 주장했다.

 몇 명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흑인 활동가들은 모두 될 수 있으면 많은 백인 여자하고 잠자리를 하는 걸 영광의 기록으로 여겼다. 남부로 간다는 게 그런 의미인지를 알지 못한 채 낯선 상황에 맞닥뜨린 여자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이런 성적 시험은 백인 여성들에게는 승산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백인 여자가 흑인 나자의 성적 구애를 받아들이면, 헤프다는 비웃음을 살 위험이 있었다. 만약 남자를 퇴짜 놓으면 인종을 차별한다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었다. 물론 이런 사업에서 인종간에 발전한 관계 중에는 진정한 돌봄과 애정의 산물도 많았다. 그렇지만 몇몇 흑인 남자들은 자기의 남자다움을 되찾으려 하면서 백인 여자를 이용했고, 몇몇 백인 여자들은 흑인 남자를 이용해 자기의 자유주의를 입증하거나 ‘죄를 속죄’했다. (…)

민주사회학생연합의 창립 성원들은 조직 내부의 성차별 문제를 논의하고 싶어한지 몰라도, 에번스의 말에 따르면 조직에서 가장 유력한 남자들 중 다수는 ‘운동’안에서 성 역할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던 여자들하고 결혼한 상태였다. 민주사회학생연합이 아직 친구들로 구성된 응집력 있는 운동일 때 이 문제가 제기됐으면 남자들이 저항을 덜했을 수도 있다고 에번스는 가정한다. (…) 에번스는 민주사회학생연합 안에서 맺어진 많은 커플들의 관계와 결혼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에번스는 이런 개인적 소란 때문에 성 역할 문제가 특히 크게 부각됐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전국협의회가 민주사회학생연합 내부에서 여성의 역할을 주제로 워크숍을 열도록 자극한 계기는 케이시 헤이던과 메리 킹이 쓴 <성과 카스트 Sex and Caste>였다. (‘운동’에 속한 여성들에게 돌린 ‘일종의 메모’였다). 1년 전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에 제출한 의견 문서를 다듬은 이 글은 다른 회의 문서들하고 함께 인쇄됐다. 여기서 두 사람은 성평등을 위한 투쟁을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장벽을 해소하는 신좌파의 전통 안에서 자리매김시켰다. (…)

에번스에 따르면 여성 워크숍이 처음 소집된 때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참였다. 그렇지만 많은 남자들이 무척 방어적인 반응을 보이자 몇몇 여자들은 방해가 되는 남자들을 배제하고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여자들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자 몇몇 남자들이 화를 내며 자기들도 여성 토론 그룹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문제를 놓고 남자들하고 토론하려고 혼성 그룹에 남은 몇몇 여자들도 남자들의 행동에 크게 실망해서다른 여자들을 만나려고 그룹에서 빠져나왔다.(…)

1966년 봄에 초기 페미니즘의 징후가 나타났다. 나오미 웨이스타인이 시카고 대학교에서 여성 문제 강좌를 열고, 헤더 부스가 징병 반대 회의에서 여성 워크숍을 조직했다. (그리고 급진 여성들이 줄리엣 미첼 Juliet Mitchell이 쓴 중요한 논문 <여성 – 가장 오래 계속되는 혁명 Women – The Longest Revolution>을 돌려봤다.) 1967년 겨울과 봄, 《뉴레프트 노트》는 ‘운동’ 진영이 성 역할을 무비판으로 수용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제인 애덤스 Jane Addams, 헤더 부스, 프랜신 실바의 글을 각각 실었다. 그렇지만 이 글들은 고립되고 개인적인 항의였다. 1967년 6월 앤아버 Ann Arber에서 열린 민주사회학생연합 전국 총회에서 급진 여성들이 양성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자 이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언어와 분석이 뚜렷하게 달랐고, 1965년 이래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그리고 여성들은 훨씬 냉담한 반응을 맞닥뜨렸다.

‘여성 해방 워크숍’은 철저한 논의를 거쳐 전체 총회에 제출하기 위한 분석과 여러 요구안을 내놓았다. 이 성명은 제인 애덤스(아마 민주사회학생연합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일 듯하다)와 엘리자베스 서덜랜드 Elizabeth Sutherland(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출신), 수전 클로크 Susan Cloke, 진 피크 Jean Peak 등이 작성했다. 작성자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미국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지위를 분석한 결과, 우리는 여성이 남성과 식민 관계에 있으며 우리 자신이 제3세계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

작성자들은 가정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난 여성에게 공동 육아 어린이집,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낙태, 가족계획 정보 보급, 가사노동 공유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민주사회학생연합 내부에서 여성이 계속 종속되면 혁명 투쟁에 차질이 빚어진다고 주장하면서 민주사회학생연합이 여성 해방에 관한 과감한 교육 캠페인을 추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렇지만 작성자들은 민주사회학생연합의 남성들에게 자기 자신의 ‘남성 쇼비니즘’에 맞서 대결하라고 요구한 뒤 변명조는 아니더라고 타협적인 어조로 글을 끝맺었다.

(…) 그 해 여름 시카고에서는 여성 문제를 둘러싸고 꽤나 많은 논의가 진행됐다. 민주사회학생연합의 고참 활동가인 나오미 웨이스타인과 헤더 토비스 부스는 그해 여름 시카고의 급진연구센터 Radial Research Center에서 여성 문제에 관한 강좌를 열었다. 민주사회학생연합 지도자 제인 애덤스는 시카고에 있는 전국사무소에서 여성 모임을 조직했다. 한편 평화주의자 바버라 라이큰 Barbara Liken은 여성의 구실에 관한 문화적 가치 절하를 논의하기 위해 자유주의 여성들로 구성된 토론 그룹을 조직했다.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활동가 출신인 조 프리먼이 라이큰이 이끈 그룹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웨이스타인과 부스가 집행하는 강좌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프리먼은 제인 애덤스가 이끄는 모임에 가서 다가오는 새정치전국회의에서 여성 해방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참가자들에게 이야기했다. 프리먼이 계획 모임을 몇 차례 조직했지만, 새정치전국회의 조직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구인 매들린 오헤어 Madlyn Murray O’Hair에게 여성 워크숍을 추진하도록 주선한 이는 라이큰이었다. 오헤어는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금지하는 데 앞장선 일로 유명해진 인물이지만, 프리먼은 그 사람이 여성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도 별로 없었다고 주장한다. 전국여성기구의 티-그레이스 앳킨슨을 비롯한 여성 50~70명 정도가 새정치전국회의의 여성 워크숍에 참석해서 결의안 초안을 만들었다.

(…)

오헤어는 ‘평화를 위한 여성 파업’의 대표자 두 명을 만났는데, 프리먼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급진 여성들의 워크숍을 ‘팔아 치웠다.’ 여성 워크숍에서 제시한 항목은 두 개만 새로운 결의안에 포함됐다. 프리먼은 절충 결의안에 분개하면서 오헤어를 만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프리먼이 회의장을 빠져나가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하고 마주치지 않았으면, 절충 결의안은 별다른 이의 제기없이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파이어스톤도 프리먼만큼이나 배신행위에 분노했고, 두 사람은 그날 밤 머리를 맞댄 채 새로운 결의안을 작성했다. (…) 프리먼과 파이어스톤은 결의안을 2000부 정도 복사했고, 여성 서너 명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결의안 제 11호를 논의할 시간이 되자 의장은 두 사람의 결의안 대신 매들린 머리 오헤어의 결의안을 소개했다. 프리먼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 자리에서 우리는 팔을 쭉 뻗은 채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의장의 머리의) 결의안을 밀어붙이고, 우리에게 발언을 청하라는 요구를 거부한다. 모든 일이 끝나자마자 나보다 작은 이 어린 친구가 내 앞에 있는 마이크로 달려들어서 손을 뻗는다. 사람들이 알아보니 그 친구가 처음 하는 말이 잃다. “숙녀 신사 여러분, 지금 미국에서 가장 억압 받는 집단인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해 한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슐리 (슐라미스의 애칭) 파이어스톤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서너 명이 그 자리를 결딴내려 했다. 그러자 (의장인) 윌리엄 페퍼 William Pepper가 슐리의 머리를 톡 치면서 말했다. “비켜요, 아가씨. 이 자리에는 여성 해방보다 중요한 문제가 많아요.” 그 일이 여성 해방 운동의 기원이 됐다. 우리는 다음주에 시카고 여성들을 만나 모임을 가졌다.

(…) 학생이 사회변혁의 정당한 동인이 될 수 있다고 믿던 백인 급진주의자들처럼 그 해 가을 시카고에서 모임을 시작한 급진 여성들도 블랙 파워에서 영감을 얻었다. 블랙 파워 덕에 급진 여성들은 여성이 자기들이 억압을 중심으로 조직하고 자기들의 투쟁 조건을 정의하는 방식이 타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블랙파워는 양날의 칼이었다. 블랙 파워는 ‘가장 억압받는 이들’의 투쟁을 특권화하면서 여성문제를 사소한 사안으로 치부하는데 기여했다. 블랙 파워 덕분에 여성들이 여성을 조직화하자는 생각을 할 수 있었지만, 블랙 파워는 또한 급진 남성들에게 여성 해방을 무시하거나 깔보는 근거를 제공했다. 마찬가지로 신좌파는 구좌파의 범주 분류와 분석을 무비판으로 받아들인 탓에 여성의 요구에 귀기울이기 힘들었다. ‘정말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투쟁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학생들의 관심사와 여성 문제는 ‘부르주아적’인 사안으로 치부됐다.

이 급진 여성들 또한 이런 비판에서 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실제로 시카고 여성들은 최초의 독립적 여성 그룹을 창설하면서 ‘운동’하고 맺은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 여성 해방 운동 창건자들은 여성을 남성하고 별개로 조직하는데 전념했지만, 여전히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운동’에 관여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많은 급진 여성들은 새로운 운동이 조직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신좌파에 밀접히 결합되기를 바랬다. 실제로 신좌파는 여성 해방론자들에게, 심지어 자율적인 여성 운동을 선호하는 이들에게도 계속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앨리스 에콜스, 유강은 옮김·엄혜진 해설, 『나쁜 여자 전성시대: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 (Daring to Be Bad: Radical Feminism In America 1967-1975)』, 2017, 61-9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