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페미니스트가 나쁜 선택을 할 때

나쁜 페미니스트의 페미니즘

 

나쁜 페미니스트(Bad Feminist)의 저자 록산 게이(Roxane Gay)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왜 나쁜 페미니스트인지에 대해 다음처럼 적는다.

 

나를 따라다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를 환영한다. 왜냐면 나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엉망진창이니까.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완벽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모든 해답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전부 옳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나는 저 높고 위대한 페미니스트 왕좌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은 완벽한 인간 같은 포즈를 취해야 한다. 그러다 한 두번 대차게 말아 먹으면 사람들이 달려들어 가차 없이 끌어내린다. 문제는 나는 허구한날 실수하고 넘어지고 대차게 말아먹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나는 진즉에 끌어내려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14p)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나쁜 페미니스트: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사이행성, 2016)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를 인용하는 까닭은 록산 게이가 말하는 ‘나쁜 페미니스트’의 용례를 되도록 그대로 가져오고 싶어서이다. 좀더 뻑뻑하게 해두자면, 이 글의 제목 <나쁜 페미니스트가 나쁜 선택을 할 때>에서 첫번째와 두번째의 ‘나쁘다’란 술어는 동일하지 않다. 전자는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편안하게 차용한 것이고, 후자는 윤리적으로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음을 말하기위해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술어이며 좀더 사전적인 의미를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지나치게 수고롭고 결벽스러운 유난이자, 록산 게이의 저술을 오독한 행위에 지나지 않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록산 게이가 즐겨 사용하는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비칭 자체에는 아무런 ‘방향성’이나 ‘지시’가 들어있지 않다. “모든 페미니스트가 언제나 나쁜 인간이 되어야 하며 배드 엔딩에만 종착해야 한다.”라고 외치고 있는게 아니다. 자신이 선하고 이상적으로 흠결없는 페미니스트의 포지션을 고수하는데 실패하기 일 쑤인, 평범한 여성들 중 하나라는 설명을 약간 비틀어서 하고 있을 뿐이다. 비틀었다는 점에서 똑똑한 페미니스트 독자라면, 이 말이 왜 그녀에게 ‘찬사’가 아니라 성가신 ‘꼬리표’가 되었는지를 추측해 볼 수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15년 촉발된 트위터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운동과 연관해서 생각해보자.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오해/증오심/몰이해/신성화/폄하가 난무하는 적대적인 상황속에서 나페미 선언은 보란듯이 터져나왔음을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나페미 선언은,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과 “나는 감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지만-“으로 말을 시작하려는 사람들, 안티-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불편함 혹은 그들을 그저 놀리고 싶은 심보 없이는 불가능했던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뒤따를 때가 있다. (뒤이어 많은 긍정적 효과와 진지한 움직임들이 일어났지만, 선언이 일어난 당시의 상황만 보면 상당히 느닷없고 우연적인 사건의 연속인 와중이었다.) 록산 게이가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나쁜 페미니스트’의 배경에도 이와 조금 유사한 맥락이 있다. 그녀 자신이 회고하기로 록산 게이는 처음부터 페미니즘에 무조건적으로 열광하는 여성은 아니었고 외려 부담스러운 압박감 내지는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녀가 경험한 불편함/부끄러움/자괴감은 많은 여성들에게 친숙한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페미니즘을 시작하기에 모자란 사람이란 생각에 빠져 들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페미 선언이 트위터를 통해 페미니즘을 처음 배운 수 많은 여성들에게 ‘수행적 발화’[1]였듯이,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는 록산 게이에게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가고 성장할 수 있게하는 동력이자 다이너마이트 도화선이 되주었다. 나는 그녀가 자신이 매번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거나 틀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대신,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비칭을 받아들이고 그 단어의 용법을 전치시켜버릴 작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 과감한 태도는 내 생각에 정말로 ‘나쁘지 않다’. 나쁜 페미니스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나쁘지 않은 선택’은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가감없는 직시와 대면 이후에 따라올 반성적 성찰의 맥락에서만 가능할 것이고, 나는 그 때 일어날 변화를 긍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나쁜 선택만을 수동적으로 지속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까? 위악을 가장하는 것과 악의 화신이 되는 것의 구분에 있어 착오를 겪으며, 언제나 의무적으로 ‘최악의 자리’에 기꺼이, 혹은 무의식적으로 주저앉는 여성이 당신의 자매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때 ‘나쁜 페미니스트’ 선언/호명이 가졌던 모든 위트와 정치적 힘은 소멸하는게 아닌가? 이 글은 그런 의구심들 때문에 쓰여졌다.

 

 

2015년의 페페페를 기억하는 2017년의 페미로그

 

페페페의 전(前) 공동 기획자였던 나는 페페페가 나쁜 페미니스트의 앞날을 격려하는 많은 이들에게 빚을 져왔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럴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여전히 말을 하면서도 껄끄럽다. 해체[2] 이후 그간 페페페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할때마다 내가 매번 주저했던 이유는 그 글이 어떻게 독해될지가 우려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는 나 혼자 모든 걸 결정하고 판단할 수 없었던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페페페를 근 2년이 지난 시점에 페미로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그 두가지 망설임을 소거할 정도로 중요한, 이 글을 반드시 써야하는 맥락이 트위터 타임라인에 생겨났다고 봤기 때문이다.

2017년에도 페페페가 존속했다면 현재 페미로그에서 하고 있는 일의 몇몇 부분이 페페페에 흡수되서 이뤄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페페페가 페미로그에 비해 훨씬 더 노골적이고 즉흥적이었으며 위험한 전략을 선호했고, 자신의 ‘나쁨’이 드러났을 때 일어나는 수치심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비웃는 제스처를 취했다고는 해도, 그 연대체에게는 종종 어떤 심각하고 촌스러운 비전이 드리우곤 했다. 2015년의 ‘반여성혐오 연대체’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의 리스트는 길었고, 페페페에게는 ‘나쁜 페미니스트’ 기믹 이외의 모습 역시도 불균질하게 요구되었다. 페미나치/삼철갑/kkk 등의 멸칭과 남초사이트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낙인과 혐오들이야말로 페페페의 존재이유를 증명하고 있는 듯이 움직이면서도, 현존하는 젠더 폭력 피해당사자들에게도 직접적인 연대자가 되고자 했다. 그 비공식적이고 임의적이었던 원칙들을 기억해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자의적인 정리기 때문에 다른 멤버 2인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1.  1. 착하게만 굴지 않는다
  2.  2. 상대를 설득하는 것에 얶메이지 않는다
  3.  3. 페미니즘을 상식적인 선상에서 쉽게 얘기한다
  4.  4. 트위터를 통해 페미니스트들, 피해당사자들과 연대한다

이제는 나를 포함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중 4항이 가장 큰 실패를 남겼고 그것이 연대체의 해체로까지 이어졌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때때로 페페페는 1과 2항을 피해당사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우를 범했다. 이 잘못들에 대해서 그간에는 외부적인 요인, 특정 멤버들 개인의 과오와 실책 위주로 그 이유가 말해진 것 같다. 나는 이글에서는 보다 그 소멸의 내부적이고 구조적인 요인을 짚고 싶다. 페페페가 불안정하고 엉성했음에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이었다면 어떤 결함이 있었는지 내게,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트위터 타임라인에 있어 한번더 지적될 필요가 있다.

 

 

태도의 공백은 연대를 결렬시키고 태도의 과잉은 당사자의 자리를 지운다.

 

페페페 활동 당시의 나와 전멤버 신희주씨는 페어를 만들어 근 24시간을 트위터에 교대로 상주하면서 페미니스트들에게 도움이 되고 또 재미있을 만한 밈(meme)을 전투적으로 생성해냈고, 진입장벽을 낮춰 페미니스트 인구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일조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학연/지연등의 인맥으로 인위적인 구도를 짜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팔로잉은 의도적으로 0으로 두었고 대신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열려있는 DM창으로 종종 연대요청도 받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피해당사자를 도우려는 사람들도 섞여있었다. 나는 그 일들의 상당수를 여성단체에 연계하는 것까지가 페페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기계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지만, 신희주씨는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피해자들의 절박한 상황과 고통에 이입했다. 특히 신희주씨의 그 태도는 페페페에게 추동력으로서 작동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종종 낙관했다. 의견마찰이나 상호 크리틱이 잦았음에도, 기본적으로 분명히 나는 낙관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알아서 잘 하시겠지”라고 넘어간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1. 1. 매우 빠른 이슈 진행 속도
  2. 2. 소화해야할 정보의 거대 물량
  3. 3. 소규모의 인력과 자원
  4. 4. 보복성 고소의 위험

위의 네가지가 주는 압박감 이외에도 ‘느슨할수록 좋은 것이다’라는 막연한 생각에 나는 자주 기댔기 때문에 했던 선택과 위임들이 있었다. 그런 일종의 공백과 마비상태는 활동이 지속되며 피로가 누적될수록 범위가 때로는 너무 커지기도 했는데 내가 여기에 대해서 좀더 빨리 방법을 강구할 수 없었던 이유에는 ‘어차피 트위터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체념이 포함되있다. 그런데 페페페가 없어지고 난 후에 나는 그것을 과연 내 개인의 체념으로만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느닷없이 들기도 했다. 왜 페페페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으로는 넘어가지 않았을까? (실제로 인스타그램 쪽은 내부논의가 있었음에도) 언제부터 페미니스트들에게 트위터가 이다지도 중요한 매체이자 공론장이 되었나? 라는 의문도.

가령, 록산 게이는 페미니스트/사회운동가/저술가로서 트위터에 대해서 이런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물론 어딜가나 ‘똥파리’들은 있기에 트위터에도 도덕성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루머를 퍼뜨리고 피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다. (229p)

전통적인 저널리즘은 분초 단위로 올라오는 소셜 미디어와는 다르게 제작 시간이 필요하다. 보도하기 전에 사실 관계와 정보의 정확성을 확인해야 한다. 이상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신문과 방송사가 우리에게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전해 준다고 믿는다. 그런 조건을 고려하고 직업 정신에 투철한 언론사 기자들이 필요한 노력과 열정을 쏟는다는 걸 감안한다 해도, 주요 신문이나 방송의 뉴스 내용들은 현재 이슈들을 속도감 있게 따라잡지 못하고 가끔은 따라잡고 싶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소규모 매체들이 그 일을 잘 해낸다. (230p)

소셜 네트워크는 그저 사소한 일상을 올리고 즉각적인 판단을 하고 가벼운 희로애락들을 배출하는 장소만은 아니다. 사회 문화적으로 중요한 시기에는 나와 닮은 사람이 많아 위안을 받는 곳 이상이 되어 준다. 소셜 네트워크는 부족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심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헌신과 연민과 지지는 한정되어 있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232p)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나쁜 페미니스트: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사이행성, 2016)

 

한국의 저널리즘은 미국보다 현격히 수준이 떨어지며, 성폭력범죄 보도시의 언론윤리가 얼마나 붕괴되있는지는 2016년 한해동안 여실히 드러났는데다, 때로는 트위터리안들이 한국의 기자들보다 더 도덕적이었다는, 잘 쓰여진 트윗이 인터넷 뉴스 기사보다 더 사실적이고 중립적이었다는 처참함을 생각했을 때 국내 페미니스트들은 어떻게보자면 ‘정말로 트위터이외에는 대안이 없는 궁지’에 몰려있다. 록산 게이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트위터를 켠단 얘기이고, 어쩌면 그래서 트위터에서 트위터 답지 못한 사건이 일어난 단 얘기이다. 예를 들어 이제는 여성단체가 된 DSO는 ‘소라넷아웃’ 프로젝트 팀에서 출발했고 트위터 없이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현실. 트위터에서 공론화된 젠더 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사회적 지위를 박탈/축소당하는 현실. 온라인의 픽셀 몇 뭉텅이가 모여서 오프라인에 실체가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이런 기적 같은 현실이 가능했기 때문에, 나는 페페페 해체의 내부요인을 재고함에 있어서 트위터라는 매체에 대한 생각을 떼어놓을 수가 없다.

페페페의 그 해시태그를 단 이름 ‘#fefefe’와 거의 모든 기획은 트위터에 최적화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젠더 폭력 피해당사자의 폭로와 가해당사자들의 2차가해가 동시에 일어나는 가상의 공간에서 페페페가 오버레이시켜서 만들어낸 희망, 그리고 절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디까지 증명될 수 있는 문제인가. 어쩌면 나보다 페페페를 밖에서 지켜봤던 트위터리안들, 페페페를 자신의 자매라고 동일시했던 페미니스트들이 더 잘 답변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 글에서는 절망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트위터에서는 사람의 안전과 신변을 보호할 수 있는 신뢰가 잘 만들어지기는커녕 너무나 쉽게 훼손되는 환경과 위험요소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데, 페페페는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했다. 트위터는 가정/회사/공동체/커뮤니티가 아니지만, 끌어다 쓸 수 있는 자원이 희박했던 페페페에게는 자신들의 공식계정 타임라인/멘션창/디엠창이 지켰어야 할 가상의 전장이자 전략적 거점이었다. 이를 운영할 때 부담해야할 실무적 책임과 윤리적 태도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여성혐오연대체’로서 실패했고 연대자/지지자들과 신뢰관계를 만들 수 없었다. 좀더 다른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거창한 하이테크나 복잡한 정치적 전략이 아니었다. 제3자/중재자로서 갖춰야 할 매우 기본적인 피해자 연대 원칙들,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범위에 대한 기본 개념틀, 이미 저지른 잘못에 대한 비난을 군말없이 견딜 수 있는 인내심과 지구력 정도였다. 하지만 논의조차 하지 않거나, 무시하거나, 페미니즘 지식을 허겁지겁 쑤셔넣고 체했거나, 되도록 빨리 벗어나려고만 했던 태도가 페페페의 전략을 텅비게 만들거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끔 뭉개버렸다. 천단위, 만단위가 넘어가는 ‘RT’와 ‘좋아요’가 공회전한다 한들 그것만으로 이 문제는 해결/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시점부터 정말로 망각해버린 것은 아닌지, 그 허울 좋게 부풀려진 틈새공간에서 피해당사자들이 가장 먼저 소외되고 고통을 겪었던 일들을 다시 생각하면 지금도 매우 아찔하고 부끄럽다. 또한, 페페페의 기획에 일정부분은 ‘쎄보이지만 유해하진 않은 농담’처럼 진행된 것도 있는데, 2차 가해 사건때 정말로 위험한 행동을 저지르는 페미니스트들이 되버렸기 때문에, 그 농담의 형식을 스스로 파괴해버린 것이 아닌지, 민망해지기도 한다. 페페페를 만든 것을 후회 하지 않고, 그 몇몇 미완의 성과들을 부정하지 않음에도 이것은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는 반성적 경험이다.

해체 직전, 신희주씨의 몇몇 발언은 젠더폭력 피해당사자의 자리를 위협할 만큼 과잉된 것이었고[3] 내 방관과 변명, 페페페 공식계정을 통한 회피적인 대응은[4] 연대를 결렬시키고 신뢰를 말소시키기에 충분한 공백이었다. 이 실패의 공모관계를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답습하지 말아야하는 것은 자명하다. 페페페 이외의 누군가는 반드시 해낼 수 있는 일이 되야하며, 그 일을 ‘나쁜 페미니스트’가 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이러한 아직은 다소 미심쩍은 결론, 또 하나의 낙관이 증명되려면 이 어수선한 글만으로는 많이 부족할 것이다. 고로, 나는 남은 할말은 트위터로 이동해서 하겠다.

 

 

 

[1] 이 지칭은 2015년 5월 5일 작성된 마야님의 트윗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해당 트윗 링크: https://twitter.com/mayajoung/status/595491254344945664

[2] 참조 http://fefefe2015.blogspot.kr/2015/07/blog-post.html

[3] 참조 http://fefefe2015.blogspot.kr/2015/07/3_57.html

[4] 참조 http://fefefe2015.blogspot.kr/2015/07/3_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