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2 04 병역거부와 병역기피사이의 남성성- 『저항하는 평화』 출간 기념 강연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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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 |참가후기| 병역거부와 병역기피사이의 남성성- 『저항하는 평화』 출간 기념 강연 후기 


정희진 선생님의 강의 진행방식은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있듯이, 매우 많은 이야기와 질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강의의 출처와 기반이 되는 책들과도 그 내용이나 방향성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세부적인 내용 요약이 나 개인적 소회를 늘어놓기보다는 제 나름의 프레임을 가지고 의미있는 할 말을 구성하는 편이 더 흥미로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강의와 책의 텍스트를 동시에 재료 삼기로 했고, 집으로 돌아와 <저항하는 평화>의 두 챕터를 참고해서 이 글을 썼습니다. 정희진, 샤샤, 이길준의 <‘거부’와 ‘기피’를 넘어 ‘탈주’하라>와 김종대, 임제성의 <‘덜’ 가혹한 군대는 가능할까?>를 의도적으로 포개고 맞대어 본 것이지요. 거울의 배면과 전면을 동시에 응시하듯이, 대담자들이 상이한 모습으로 주목하고 있는 듯한 남성성의 궤적을 좇는 저의 실험이 이 글의 목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분화된 남성성 – 청년의 잉여담론이 군대를 마주하는 방식

먼저 정희진 선생님께서 강의해서 언급하신 ‘한국 군대와 한국 사회의 관계 변화 흐름’의 3가지 단계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흐름은 한국 군대의 급격한 팽창 후 도래한 탈력화 과정, 그에 따르는 군비와 군대가 생산하는 사회적 지위와 위신의 축소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첫 머리에 올 지점은 한국전쟁 직후로, 이 시기의 군대는 가난한 남성들에게 계층이동의 기회를 주고 국민으로서의 자격증을 찍어낼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사회화 기관으로써 기능했습니다. 이러한 군대의 근대성과 엘리트성은 독재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고 주한 미군의 병력감소 이슈가 미국에의해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자, 그 권력을 위협받는 시기를 맞게 되는데 이것이 두 번째 흐름입니다. ‘한국군은 미군이 용산에서 나가고 작전통제권 가져오면 나라 망하는 것으로 생각’*이란 식의 두려움이, 정작 미국은 현대전에서 더 이상 활용하지 않는 재래식 미군의 전투전략을 오로지 우리의 군대만이 미신적으로 고수하게 만들어 왔던 것이지요.
이것이 국제정치와 구시대적 냉전이데올로기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면 세 번째 흐름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간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개인의 우수한 생산성을 그럴듯한 부의 전제조건으로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특성 때문에 전통적 가족관계의 존속, 유교적 가부장제의 규범과 더불어 군대라는 공간도 더 이상 남성에게 든든한 경제·정치적 자산의 격납고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군필자가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가 희박해지고 군대를 기점으로 진짜사나이/가짜사나이와 국민/비국민을 가르던 이분법이 흔들리게 되면서, 군대에 못/안 가는 비군인 신분의 남성들도 다면적인 층위들로 분화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간첩, 무적자, 은둔자 같은 사람구실 못하는 비정상적인 남자로 퉁쳐지던 집단들이, 종교/정치적 신념/성적지향 등의 명분으로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남자, 자발적 루저/단순 포기와 부적응/입대후 귀가조치된 후 돌아가지 못하거나 병무청의 방치로 혼란상태에 놓여있는 경우 등의 병역기피의 이유가 불분명한 남자로 현재까지 분화되어 왔습니다.

특히 마지막 남자들의 잉여적 남성성은 국가를 비롯한 그 어떤 주체들에 의해서도 기획된 젠더는 아니지만, 80년대 후반부터 튀어나왔던 양심선언이란 호명이 현재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과 평화운동으로 변화하면서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남자들과 그 범주의 경계가 상당부분 겹쳐진 듯 보입니다. 비장한 매니페스토와 대의명분 없이도 평화를 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인데, 그렇다면 흐릿한 야망과 낮은 연비로 운영되는 삶의 한가운데 있는 유사/실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집단에게 무언가 평화의 윤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분열과 탈주가 곧 해방이고 평화라는 식의 논리는 지나치게 방만한 게 아닌가? 라는 의구심을 남겨두고, 작년 10월 24일 서울의 한 사진관에서 열렸던 <전국애매한병역의무자 입대실패 기념 병역과 무관한 음악공연>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여기에는 군입대후 귀가조치되어 기약없이 방치된 음악가들, 군필자 아저씨, 미필자인 고3 악플러, 외국인, 좋아하는 밴드를 좇아온 그루피 여자들, 기타 등등의 힙스터들이 스무 명 남짓 모여 있었습니다. 공연되는 음악들은 무언가 중얼거리거나 소리지르며 공간을 목적성 옅은 에너지로 비스듬하게 채워 넣었고, 라인업 중에 한 밴드였던 ‘쾅프로그램’의 ‘나 아니면 너’ 라는 노래가 그곳에 연주되자 뚜렷한 형체가 드러나는 ‘우리’라는 건 없는데 각자의 불편함을 끌고 와서 일단 모여는 있는, 공적인 등록에서 제외된 사생아들의 잉여 상태를 목격한 것도 같더군요. 그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그게 너무 싫어서 / 앞으로 차고 / 뒤로 차고 / 그게 너무 달라서 / 좌우로 밀고 /
위로 밀고 / 아직은 나 아니면 너 / 아직은 너 아니면 나

재정립된 남성성 – 안전한 군대가 견인할 폭력 뒤에서 보장되는 실재적 평화

김종대 님과 임재성 님은 책에 실린 대담에서 남성성이라는 지칭을 사용하진 않았습니다만, 두 분이 지적하는 한국 군대의 고질적 병폐와 그로 인해 발생된 문제적 결과들의 문제적 원인에는 젠더이슈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재정립된 게 아니라 앞으로 재정립되어야 하는 남성성에 대해서 김종대 님은 전제하고 있고, 임재성 님은 그로 인해 정말로 군대가 바뀐다면 군 안팎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평화가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군대는 그 특성상 민주화될 수는 없지만 제도와 규범, 그리고 기술을 합리화해서 전쟁에 대한 위기관리를 수행할 남성성을 필요로 하는 공간이다- 그것이 군대가 존재해야 할 정당성에 가깝다- 라는 가정하에서는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즉, 이러한 관점들에서라면 앞서 거론한 분화된 남성성과 잉여화된 청년들은 교정되어야 한다기보다 관리되거나 군의 경계 밖으로 배제되어야 할 관념과 대상들로 규정되기 쉽습니다. 조금 더 두 종류의 남성성을 포개어 보기 위해, 앞서 정희진 선생님이 지적한 세 가지 흐름을 여기서도 따라가며 두 대담자들의 문제의식과 제안들을 소개해보겠습니다.

1980년대 말에 리영희 선생과 국방부의 논쟁은 남과 북 중에 누가 더 세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그 논쟁이 의미가 없어요.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라면 국가 전체의 국방력은 전혀 별개의 문제거든요. 국지전에서 군사력 비교는 의미가 없어졌고, 또 군사력이 비대칭적인 양상이 되었죠. 똑같은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기로 싸운다는 겁니다. 아프가니스탄은 휴대폰으로 폭탄을 폭파시키죠.

20대 때 해군장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리영희 씨는 정희진 선생님이 한국 군대로부터 엘리트성을 수혜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은 분입니다. 저는 저 논쟁과 김종대 님의 지적이 군축이슈뿐만 아니라, 미신화된 남성성이 주도하는 국방정책의 앙상한 원칙주의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은 마땅히 적을 보면 물러서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전체 육군 병력의 54만명 중 35만명을 휴전선 인근에 배치해 전쟁 발발시 병력의 40퍼센트를 초기 방어과정에서 잃는 위험을 내포한 재래식 전투계획의 당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국가의 안전은 언제라도 무너지고 실패할 수 있다는 계산 대신,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미명하에 군대를 향하는 모든 문제제기의 정당성을 차단하고 그 원칙의 앙상함을 보완하고 숨기기 위해 종북몰이에 몰두해 온 것이 한국의 군이고 그것을 논하는 극우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지속된 만능 반공주의와 함께, 한국 군대의 미군에 대한 의존성과 시대착오적 동일시, 모방행동은 국가 안보를 정치화/이데올로기화시켜 선거철에만 들먹이다가 ‘그냥 하던 대로 하면서 나쁜 서사를 반복하는’ 유명무실한 명분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제대로 된 주권과 평화를 위해서는 망령의 호통이 아니라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할 텐데 말입니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 앙상함이 진보 진영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고, 군사주의와 군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데 비해 대책과 계획이 부실했던 한국의 구 운동권들의 태도는 현행 헌법의 정상 작동을 통한 국가 안전의 보장권을 말하는 데 소극적이었으며, 분화되고 잉여화된 세대의 남성성과 한국 군대 간의 불화가 초래한 수많은 희비극적 사건사고들 앞에서 보수진영만큼이나 속수무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현대화되어야 할 한국 군대를 위한 제도적 개선점들과 함께 김종대님이 예로 든 모병제/공동 어로구역/개성 공단 유지/6자 회담의 조치를 통해 ‘골든아치’ 이론의 지경학적 사고를 군사 정치에도 적용한 후 민주적 국가/작지만 강하고 효율적인 군대들간의 상호의존과 협력관계를 기반해서 전쟁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힘의 평형상태’를 만드는 방법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 임재성 님은 ‘민주주의 국가들 간에는 전쟁이 없다’식의 논리는 미국의 CIA 등을 통해서 개입된 제3세계의 수많은 전쟁들을 은폐하고, 전쟁의 양상 자체가 국가 간 전쟁이 아닌 내전과 테러의 형태로 전화했음을 간과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평화운동이 향하고 있는 지평선의 길이를 가늠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대 님이 예시로 든 1차세계 대전 와중의 Live and Let Live(나도 살고 너도 살자)와 유사한 현상, 각자의 참호에 들어가 정해진 때에만 허공에 총알을 버리거나 병사가 자신의 적군 앞에서 총구를 내려놓는 결정을 유도/격려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공허한 논의로 끝나지 않는 ‘실재적 평화’와 전쟁가능성의 소거라는 목적을 잊지 않는 ‘평화 안보’가 협력해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한국군 안에서 병역의무를 수행중인 다수의 남자들의 저항권과 인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풍부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자에게 그들은 잠재적 해방의 주체이고 후자에게 그들은 관리와 통제의 대상일지라도 말입니다.

쓰기가 수월하지만은 않았던 글이 끝났습니다. 이제 저는 일단 책을 마저 읽어야겠고 잉여답게 ‘전쟁없는 세상’의 페이지부터 좋아요를 누른뒤, 평회원으로 활동중인 민우회 독서 소모임 ‘여백’안에서 정희진 선생님의 추천 도서 ‘동맹 속의 섹스’를 함께 읽으며 기지촌 이슈에서 드러나는 한국 남성성은 무엇이고, 이것은 동시대 병역기피/거부 흐름과 어떻게 맞닿으며, 우리는 우리의 위치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썰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