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2016년 2월이면,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된지 1주년이 됩니다. 페미니즘 이외의 계기도 있었지만, 저는 분명 저 해시태그에 경도되어 작년 2월 13일에 페이스북을 중단하고 트위터로 넘어와 이 계정을 만들었습니다. 4.19-7.21일까지 페페페의 일원으로서 1인시위 등의 활동을 기획/추진하며, 트위터에 말그대로 진을 치고 상주한채로 세달을 보냈습니다. 2015는 제게 그 어떤 해보다 스스로의 한계에 많이 부닥치며 쉬지않고 움직인 시기였어요.

일단락의 의미로서 2015의 제가 중요하게 체크했던 읽을거리를 정리하고 2016으로 넘어가고 싶어, 연휴동안 오늘부터 틈틈이 반자동봇이 되어 몇가지 글을 인용해 탐라에 옮겨놓으려고 합니다. 추려보니 잡지1, 교지1, 경향신문 칼럼2, 자료집1입니다.

DOMINO 7, 39-48p – ‘Is라는 블랙박스’ _전현우, 39-48p – ‘우리가 곤충이었을 때’ _윤원화
고려대 여성주의 교지 석순 제44집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86-103p – ‘페미니즘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 _촤우챠우, 68-85p – ‘이 넓고 큰 고려대학교에서 나의 둥지를 찾으며’ _토닉워터
경향신문 [별별시선] 페미니즘을 위하여 _노정태
영 앤 영거 영원히 : 해방되어 아름다운 그녀들의 이야기_(사)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78-79p – ‘페미니스트 선언에 대해서’ _권김현영
경향신문 [페미니즘이 뭐길래] 4회 남성진보논객과 담론헤게모니: ‘청년진보논객’ 데이트폭력 폭로에 부쳐 _김홍미리


 

DOMINO 7, 39-48p – ‘Is라는 블랙박스’ _전현우

이슬람국가(IS),또는 더 광범위한 무장 지하드 세력 측은 자신들의 팽창,증식,정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이에 대한 큰 그림을 칼리프제 수립을 위해 2005년도경에 이라크의 알카에다 수뇌부가 작성했던 7단계의 행동계획에서 짐작할수 있다.

7단계는 다음과 같다.
1.각성(2000~2003)
2.개안(2003~2006)
3.일어섬(2007~2010)
4.부활/권력투쟁/혁명(2010~2013)
5.국가선언(2013~2016)
6.전면 대결(2016~2020)
7.최종 승리(2020~)

(..) 제 3기에는 각지의 치안 불안이 일어나 이라크 이외의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시기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라크의 알카에다는 미국의 대규모 토벌 작전에 의해 멸망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던 것 같다. 상황이 역전된 것은 제4기에 있었던 “아랍의 봄” 덕분이다. 아랍 각지의 시위로 인해 이슬람주의자들은 정치적 주장을 실현시킬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은 민주 선거 참여로 대응했지만, 이슬람 국가는 더욱더 강력한 테러와 정복전쟁으로 이라크-시리아의 불안을 더 확대하여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방책을 택했다. (..)

자르카위는 이라크 사회의 취약한 고리를 찾아 파괴하는 수법을 사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시아와 순니 사이의 대립이라는 해묵은 요소를 찾아냈고, 서로의 증오를 부추기고 지속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해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이슬람국가는 정예 미군 10만의 공격 앞에서도 살아남았다. (..)

이집트의 청년들이 과격화된다면, 그리고 이들이 자르카위를 따라 이집트 사회 내에 원래 존재하며 이슬람 국가의 현행 노선이 쉽게 폭발력을 낼 수 있는 분할선을 발굴해 그 양측의 갈등과 원한을 조장하게 된다면 이슬람국가는 이슬람세계 전체에 걸쳐 강력한 파급력을 지닌 정치체로 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

참고로 무슬림 인구(약 15.7억,2009년)는 중국(13.6억,2013년)이나 인도(12.5억,2013년)의 인구보다 많다. _44-47p 무슬림 형제단은 2011년 이른바 “아랍의 봄” 당시 가두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민주선거에서 집권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은 군부 또는 세속주의 독재자들에게 민주주의적 담화와 행동을 통해 대응했지, 총포를 동원한 군사적 대응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또한 집권 역시 ‘세속적’, ‘서구적 선거’에 의한 것이었다. 무슬림 형제단과 이슬람국가(IS)가 현재 처한 상황은 이슬람주의의 내부 분파 대립을 좀더 입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

군사쿠데타로 인해 실각하기 이전의 무슬림 형제단은 전형적인 제도 내 투쟁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 사토시는 이 가운데 이집트의 제도 내 투쟁 노선이 결국 무너졌다는 데 주목했다. 이들의 실패는 IS와 같은 제도 외 투쟁노선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_40p 이슬람 국가가 보여주는 종말론적 색체에 대해 언급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가운데 IS가 인용하는 약속 또는 언급은 선한세력과 악한 세력 사이의 대규모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이슬람 전승이다. 이슬람 국가의 공식 잡지 제목인 “다비크” 역시 이와 관련된 지명으로, 종말의 날에 앞서 일어날 전투가 있을 장소라고 한다. (..) 이미 심판 속에서 구원받을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신법의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고, 파멸할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또한 그 운명을 바꿀 수는 없으니 체념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심판에 앞서 무언가를 할 수 있어야만 이슬람국가의 권고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선과 악의 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신의 심판 속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전승이 마침 『하디스』 속에 있었다. 바로 이 요소를 이슬람국가는 활용하려 했던 것 같다.(..) 사토시는 아랍어권에서 종말에 대한 논의가 1990년대 이래 대중적으로 유통된 바 있다는 점, 그러나 (..)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이전 세대의 지도자들이나 이슬람국가 직전 지하드주의 세력이 발간한 잡지의 기사등에서 자신들의 논의에 적극 수용하여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장면은 없었다고 지적한다. 이슬람국가가 종말론을 활용한 것은 따라서 현대 지하드 운동의 맥락에서는 분명 새로운 부분이다._42p

 

DOMINO 7, 39-48p – ‘우리가 곤충이었을 때’ _윤원화

매끄러운 키틴질 껍데기로 둘러싸인 이 조그만 동물들은 포유류적 의미의 개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간과 공간의 전 방향으로 이합집산하는 가변적 단위에 가까워 보인다. 그들은 하나의 생애주기 내에서 전혀 다른 신체로 변채하고, 다른 개체들과 연합해서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행위능력을 발휘한다. 그런 까닭에 일부 곤충학자들은 곤출 군집 전체를 일종의 초유기체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군집 전체가 하나의 동물이라면, 그것은 꿰뚫을 수 있는 심장이나 머리도, 들여다볼 수 있는 눈도, 악수할 수 있는 손도 식별되지 않는 동물일 것이다._26p 그런데 이 시기에는 자기계발 담론을 비스듬히 벗어나는 또 다른 개미지옥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출현하고 있었다. 이 ‘개미지옥’은 원래 팬덤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매력, 빠져 죽을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 수 밨에 없는 꿀단지 같은 매력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2007년 한 여성지가 진행한 배용준의 일본 팬 인터뷰에서, 오카다 에리코라는 여성이 배용준을 “개미지옥”으로 칭했을 때만 해도 이 표현은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았다.

(..) 자기주도적인 발전의 기법들과 꿀단지의 성은을 입기 위한 어떤 주술적 행위들을 기묘하게 뒤섞었다. 거기에는 여전히 나의 작음에 대한 혐오를 원동력 삼아 현재의 결핍을 미래를 향한 시차로 변환시키는 벌레혐오적 발전주의가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연약한 시간의 구조는 무지개 너머의 꿀단지에 대한 믿음과 함께 천천히 주저앉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꿀단지는 대부분 터치스크린 너머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얇고 빠르게 우리의 손끝에 붙어다닌다. _32p

 

고려대 여성주의 교지 석순 제44집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86-103p –  ‘페미니즘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 _촤우챠우(獅子犬)

현재 우리가 놓인 학생사회는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최근 들어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사람들도 처음으로 여학생 모임을 조직한 80년대의 사람들이나 전사를 자처했던 90년대의 영 페미니스트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분명 그들의 싸움으로 학생 사회에 성차별적 문화가 많이 개선되고 제도적 차원의 개선도 이뤄졌지만, 다른 지형에 놓인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모델을 몇 장의 지면으로 온전히 제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

< ‘여성주체’에서 ‘보듬이’>

내가 아무말도 하지 못했던 그 새터에서, 선배들은 반성폭력내부규약이 담긴 자료집은 버려도 된다고 말했다. 결국 아무런 논의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차피 다 알고 친한 사이인데 굳이 그런거 할 필요가 없는’, 귀찮은 것이 되어버렸다. 또한 규약을 정하는일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 반성폭력내부규약과 여성주체는 학생회나 동아리 등 여러 학생사회의 조직속에서 여러 이름으로 변해왔다. 반성폭력내부규약은 성평등자치규약으로 변하기도했고, 여성주체는 평등주체나 보듬이 같은 이름으로 변했다. 이게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니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공격은 계속되고, 형식으로나마 남다가 이처럼 아예 본래의 취지를 잃고 변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장되기도 한다. (..)

< ‘피해’와 ‘피해자화’>

페미니즘이 ‘만연’하다는 것은 사실,정말 페미니스트들이 활동을 많이 하고 페미니즘조직이 잘 돌아가고 있어서가 아니다.페미니즘이 만연하다는것은 여자들이 하는 것도 없으면서 얻는것도 많고 원하는것도 많다는것의 다른표현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이 순전히 양성 간 피해의 정도로 고착되는 프레임은 그 자체로 여성을 타자화 한다. 누가 무언가를 더 얻어가야 하는지로 논쟁의 범위가 완전히 축소되면서, 여성은 이 체제에서 뭔가를 받아가는 사람 이상의 존재를 차지하지 못한다.  여전히 일상에서 나타나는 성희롱적 발언들과 불편한 농담들,친밀함으로 가려진 성폭력은 논의의 대상에 오르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오히려, 더 ‘만연해질’ 필요가 있다.(..)

<4.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선언에서도, (..) 자신이 왜 페미니스트인지, 왜 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 모두 달랐다. 모두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면서도, 너무도 다양한 주체가 있는 이 상황은 ‘모호함’ 그 자체다. 그러나 이 ‘모호함’은 위기가 아닌 가능성이다. 여성이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토대로 하는 정치적 행위만 페미니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 속에서도 특정한 집단의 행동만이 페미니즘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페미니스트 정치의 위기는 단일한 주체를 요구하는 페미니즘의 개념과 인식론에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주의라는 말 앞에 붙은 ‘여성’의 동등권에서 끝나고 마는것도 아니다.(..)

<나에게는 페미니즘이 무엇인가>

정체성이란 자기동일성의 환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흔히 말하는 ‘고부심’은 모두가 똑같은색의 옷을 입고 함께하는 그속에서 강화된다.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는 ‘환상’이고, 그 정체성에 균열을내는 노이즈나 여백은 존재한다.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를스스로답게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여백을 자신의 외부에 투영한다.과반에서 끊임없이 장애인과 성소수자를 희화화하고 여성을 대상화하는 폭력적인문화가 이어지는것도 그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고대인’이라는 정체성의 강화와 함께 한다.(..)내게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내게는 관계를 성찰할 수 있는 거리와 틀을 제공해준게 페미니즘이었다. 폭력적인문화를 바라보는 거리를 제공하고,그와는 다른 방식을 제공해준 것이 내게는 페미니즘이었다.

 

고려대 여성주의 교지 석순 제44집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68-85p –  ‘이 넓고 큰 고려대학교에서 나의 둥지를 찾으며’ _토닉워터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말은 이미 증후군으로 양식화되기도 하였다. 본인이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느끼는 합리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가 붙었을 때 따라오는 편견이나 부담감은 거부하고 싶기에 나타나는 표현이다. 리사 터틀(1999)이 설명한 이 증후군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성차별이 존재하고 여성이 그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기에 페미니즘의 필요성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페미니스트로 인식되기 싫어하는 경향. 페미니스트라는 표지에 의해 사납고 경직되고 유머 없고 교조적이며 정치적 올바름에 사로잡히 여성이자 남성 혐오적인 레즈비언 이미지로 비춰질까 두려워하는 여성들의 심리상태.’ (…) 학내에서 페미니즘 담론을 꺼낼 때 가장 큰 벽을 느끼는 때는 당사자인 여성이 페미니즘을 부정하는 순간이다.

실컷 여성주의 교양자료를 작성하고 나름의 토론도 진행했더니 누군가가 ‘나는 여성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너무 민감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해버린다면, 여태까지 당위적으로라도 동조했던 남학생들은 과반 내에서의 여성주의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근거를 얻는다. 몇날 며칠 공들였던 설득이 한 순간에 예민한 여성우월주의자의 나홀로 외침이 되어버린다. (..)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호명하기를 거부하는 여성들은 어느정도 전형성을 갖는다. 하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이 가져오는 미묘한 발언권의 감소를 인지하고 전략적으로 거부하는 경우이다. 남성이 주류를 점하는 공동체 내부에서 페미니스트란, 남성인 자신들을 가해자화하며 표면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들고 나와 긁어 부스럼 만드는 해악과 같은 존재이다. _78-80p

“막차시간 지났으니까 당연히 여자애들은 다 집에 갔지.”(..) “남성들이 만들어내는 술자리 문화에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혹은 편안하게 참여할 수 없음은 특정 연구결과나 보고서가 인용되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여성적 경험”이다. 술자리에 자주 혹은 오래 남지 못하는 여성들에게는 쉽게 열등한 가치가 덧씌워진다. 우정과 지성의 공간, 대학생활의 주축을 이루는 공간처럼 의미화된 ‘남성다움’의 반대편에 위치한다고 여겨지는 ‘여성적 특성’들은 폄하되는 것이다. (..)

‘다른 남학생들은 명예남성에게 ‘남자끼린데 뭐 어때?’ 라며 음담패설을 공유하는 특권을 주기도 하고, ‘너는 얼굴이 무기니까 늦게까지 다녀도 괜찮지?’라며 밤늦은 술자리에 친히 불러주기도 한다. 명예남성은 낭만적인 대학문화의 꽃, 남성끼리의 놀이문화를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여학생인 것이다. (-나는 명예남성이었다…아니 지금도 때에 따라선 명예남성이 되곤한다._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춤추는 입술> 1호)

시간이 지날수록 명예남성을 연기하는 일은 어려워진다. 자기 부정속에서 계속되는 감정노동은 스스로를 소진하게 하고, 그 소진의 끝에서는 결국 주변부를 떠돌았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학생들은 대학문화와 점점 거리를 두다가 ‘사라진’ 여선배가 되고 만다. _70-73p

 

페미니즘을 위하여 _노정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06142042235

남자들 중에서도 스스로를 비교적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유독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의 구분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분야의 고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규항의 칼럼 ‘그 페미니즘’을 떠올려보자. 그의 논지는 단순했다. 계급해방보다 여성해방을 앞세우는 ‘그 페미니즘’은 가짜라는 것이었다. 최근 트위터에서 터져나온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달기 운동에 대해 반감을 표하던 고종석도, 말하자면 ‘페미니스트 감별사’ 대열에 동참했다. (..) 나는 그에 대해 각별한, 아니 차라리 애틋한 경외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을 ‘스탈린’이나 ‘크메르루주’에 빗대는 나의 우상을 보며,본 필자는 형언하기 어려운 비감에 젖어들었던것이다.(..)

이 운동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닌가?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에게는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없다. 평화와 비폭력을 주장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달리, 폭력을 투쟁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하는 말콤X는 ‘진정한 흑인운동가’가 아니라고, 어떤 백인이 지껄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영 앤 영거 영원히 : 해방되어 아름다운 그녀들의 이야기 78-79p – ‘페미니스트 선언에 대해서’ _권김현영

한 번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던 일이죠. (..) 근대사회에서 누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면서 문명인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정도의 상식으로 저는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 망설임을 가질 이유는 앞으로도 없을 것 같고 전에도 없었던 것 같아요. 돌꽃모임의 기본정신이 저열하고 편협한 페미니스트 (..) 우리는 아무도 설득하지 않는다, 우리한테 설득을 요구할거면 돈을 내라, 이런거였거든요. (..) 내가 설득하고 같이 만나고 싶은 사람들한테 설득력있는 언어를 만드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냐,이 플랫폼을 만드는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거기엔 남자들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죠. (..)페미니즘을 오해하는 말,혹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아무리 쫓아다녀도 (..)아무리 얘기해도 안 바뀌어요. 감정이기 때문에. 논리 얘기가 아니거든요. (..) 불편하고 싫은 거에요. (..) 저는 안티페미니즘에 반대하는 걸로 바뀔 수 있는건 아마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페미니스트이다라는 말로, (..)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체화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왜냐면 페미니즘은 지향이고 이데올로기고 사상이고 가치관이니까요. 페미니스트가 정체성이라는게 너무 이상하지 않나, (..) 계속 갱신해야 되거든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얘기하려면 나의 페미니즘을 계속 갱신하고 계속 버려야 하는 일인데,이걸 정체성이라고, (..) 선언으로 될 수 있는건 아니지 않나. 약간 낯설었어요.

그런데 뭘 몰랐냐면, 페미니스트라고 하는걸로 사람들의 미움이 집약되어 있었구나. (..) 정말 몰랐던 거 같아요. 페미니즘을, 페미니스트를 사람들이 미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 그래서 지금 친구들이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에 대한 연대 같은 감정이구나. (..) 되게 고마운 일이고 새로운 일이구나라고 하는 걸 굉장히 나중에 알았어요. (…) 고마운 일이라는 것도 몰랐어. (..)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를 아예 무지로 대응하니까 완전 공기청정 지대처럼, 하나도 두렵지 않아 그런게. 페미니스트로 계속 하는게 나한테 한번도 고민했던 문제가 아닌 거에요. 그걸 생각할 만한 여지가 있는 문제도 아니었던 거지. 그런게 가지고 있는 힘이 또 있지 않나. 해맑음이 가지고 있는 힘이 또 있지 않나.

 

남성진보논객과 담론헤게모니: ‘청년진보논객’ 데이트폭력 폭로에 부쳐 _김홍미리 

http://h2.khan.co.kr/201511301048571

참다못한 젠더연구자들이 이제는 대놓고 ‘남자들은 왜 나서지 않는가’라고 물으며 나설 것을 요청했지만 그것을 들어야할 이들은 듣지 않거나 침묵했다. 이 글을 쓴다고 해서 남성논객이 태도를 달리할지도 미지수다. 그런데도 나는 이 글을 쓴다.

가해자로 지목된이의 지인이자 청년논객이기도한 김민하의 글을 보며 이 글을 써볼 엄두를 냈다는 걸 이 참에 고백한다. ‘가해자의 곁에서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될수 있도록 조력할 것’이라는 그의 메시지는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고파했던 연대의 손짓이었다. 피해자들의 폭로글을 포함해서 데이트폭력 관련 기록들은 빠르게 삭제됐다. 사건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황급히 줄어들었고, 정치적 사안에 민감했던 논객들도 애초부터 이 일에는 무관하다는 듯이 발언을 삼가고 글을 멈췄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페미니스트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분위기는 또 그렇게 묘하게 흘러갔다. 이런 분위기가 낯설지는 않다. 진보진영에서 여/성폭력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입(만)을 바라봤고 이것은 종종 페미니즘에게 신뢰를 실어주는 듯한 형태를 취하곤 했다. (..)페미니즘을 신뢰하다 못해 페미니즘에(만) 의지하는 이런 오래 묵은 관행은 결국 여/성폭력을 오롯이 페미니즘만의 책임으로 가두고 결과적으로 ‘여자들만의 문제’처럼 판을 키워왔다는 ‘판단’을 해주었으면 싶다. 이런 방식은 페미니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시급한 사회문제에 대한 책임 방기라는 것도 직면했으면 한다. ‘나는 어쨌든 남자’이기에 페미니즘에 위탁한다는 태도는 정치사회적인 이슈마다 목소리를 높여온 논객들이 유독 여/성폭력 이슈에 입을 닫는 일을 정당화해주는 기재가 되어왔고, ‘여성폭력 나빠요’라는 선언적 수준에서의 합의 이상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와 너’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의 문제로 타자화한 결과는 페미니즘을 타자화하고 물신화하는 결과로 이어져왔으며, 급기야는‘(이상한/외골수/파쇼/현재의)페미니즘이 문제인 것’으로 귀결되어왔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데이트폭력 폭로이후에 국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대해 촉각을 세우고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굳건한 침묵이 꾸준히 유지될수는 없다. 개입을 꺼리는 정서가 이들에게 깊이 공유되지않는이상 말이다.(..)그리고 이 모든일의 해결, 책임, 뒷감당(?)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위탁됐다. (..)

정치·경제·사회 영역을 아우르며 한국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일이 업인 이들이 유독 여/성폭력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은 그들이 처한 ‘남성’이라는 지위와 관련되어 있다. 맑시스트 철학자 이종영(2004)의 연구는 그 연유를 추측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는 관념적으로 여성해방을 내세우다가도 여성해방이 실재로 실현되려고 할 때, 그들 자신의 (성적지배의) 무의식과 만나는 남성주체에 대해 논한 바 있다.(..)러시아 혁명 후 신설된 여성부를 ‘여편네센터’, ‘여편네위원회’라고 부르며 조롱하던(남성) 볼세비키가 가졌던 두려움만큼이나 페미니스트 인식론과 ‘진보’의 만남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서 ‘이상해진’ 페미니즘을 몰아내는 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청년/진보/논객’인 이들이 왜 이런 ‘연애’를 하는지, (..) 기괴한 입장문이나 가르침 말고 폭로 이후의 쟁점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고 고민했어야 한다.